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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순간은 마지막에 온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느닷없이 내 인생에 되돌아온 것은 초여름의 일이었다. 츠키시마, 너 사진 잘 찍는다며. 고교 졸업 후로는 연락 한 통 없던 녀석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는 하는 말이 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도 나도 추억에 잠겨 옛 일을 이야기하거나, 언제 한 번 보자는 인사치레를 주고 받을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기에 딱히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다만 놀랐을 뿐이었다. 지난 2년간의 공백이 이렇게 허무하게 깨지는 것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진이라니. 그와 내 사이의 거의 유일한 접점이었던 배구와는 심각하게 동떨어진 주제였기에 나는 자연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입 밖으로 내는 것은 태연을 가장한 까칠한 답변이었지만. “취미로 가끔 찍을 뿐이야.”“그러니까, 잘 찍느냐고.” 난데.. 더보기
정하(靜夏) 1. 이변의 시작은 썩 대단치 않았다. 케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이다. 그 때 케이는 내 눈에 보일 정도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냉정하고 침착한 어른으로 커가던 일곱 살 터울의 동생은 가족에게도 좀처럼 빈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 나이 또래라면 한 번 쯤은 해보았을 고민들마저도 홀로 조용히 해결하고 삼켜왔던 아이였다. 내내 그렇게 자라온 동생이, 미성년의 끝에 와서야 그토록 혼란을 겪고 있던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신기한 점은 그런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오직 나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가장 큰 이해자인 어머니도 케이의 변화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듯 보였고, 케이와 가장 친한 단짝도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었다. 그 때는 아무도 모르는 케이의 세계에 홀로 덩그러니 떨어진.. 더보기
완전한 사랑을 바라고 0. 오래도록 염두에 두고 있던 여행이었다. 처음 입원하던 날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에게 공책 하나를 건넸다. 깔끔한 민무늬의 노란 공책이었다. 한쪽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생사의 갈림길에 위태로이 서 있으면서도 손에 꼭 쥐고 있던 공책을 건네며 말했다. 나중에, 언젠가 꼭 가고 싶어. 죽기 전에, 왕님이랑. 카게야마는 두 손 가득 물감이 가득 묻은 츠키시마의 손을, 떨리는 제 손으로 버겁게 감싸 잡으며 울먹였다. - 그래, 그러자. 꼭. 내가 약속할게. 정신을 차리니 불과 반나절 만에 주변이 생소한 언어와 분위기로 가득 차올랐다. 겉모습부터 말투까지 모두 낯선 사람들 속에서 카게야마는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본 츠키시마는 어설프게 웃더니 방황하는 카게야마의 옷자락을 잡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