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靜夏)
1.
이변의 시작은 썩 대단치 않았다.
케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이다. 그 때 케이는 내 눈에 보일 정도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냉정하고 침착한 어른으로 커가던 일곱 살 터울의 동생은 가족에게도 좀처럼 빈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 나이 또래라면 한 번 쯤은 해보았을 고민들마저도 홀로 조용히 해결하고 삼켜왔던 아이였다. 내내 그렇게 자라온 동생이, 미성년의 끝에 와서야 그토록 혼란을 겪고 있던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신기한 점은 그런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오직 나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가장 큰 이해자인 어머니도 케이의 변화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듯 보였고, 케이와 가장 친한 단짝도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었다. 그 때는 아무도 모르는 케이의 세계에 홀로 덩그러니 떨어진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아이의 파란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일지, 섣불리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정도로 비밀스럽고 예민한 영역이었다. 전에 없던 혼란의 파도에 나 역시도 케이에게 물어보려 하지는 않았다. 불안하고 놀라웠으나 그런 순간은 언제나 있었다.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형이어도 늘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을 믿기로 하니 위화감 역시도 일부가 되었다. 동생의 혼란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여름이 되었다. 케이는 슬슬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입시 공부에 묻혀 살아가다시피 했다. 그는 수도권 대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다섯 시간도 겨우 잘 정도라며 언젠가 어머니와 통화할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시간에 흘러 보내고만 있었던 묘한 감각이 살며시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대학을 간다고는 했으나 센다이 밖으로는 나갈 마음이 없다던 언젠가의 케이가 떠올랐다. 그러던 아이가 갑자기 도쿄로 나갈 생각을 한다. 아리송했으나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러다 여름 골든 위크 때, 사흘 간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케이의 방에서 나오던 그와 마주치자 그는 부리나케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낯선 이의 깍듯한 인사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닫혔던 문이 열리며 나보다도 더 당황한 얼굴로 케이가 방에서 나왔다. 그 날은 부모님이 모두 집을 비우고 나와 케이만 남아있던 날이었다. 그 날의 나는 늦잠을 자서 집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케이는 내가 여태 집에 남아있었던 것조차도 몰랐던 건지 드물게도 정말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눈치가 빠른 케이는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와 마주쳤던 그 아이의 팔을 잡아끌어와 통성명을 시켰다. 아이의 팔은 케이의 것보다는 훨씬 건강한 색이었으나, 그의 갈고리같이 마른 손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이상하게 그 팔에 자꾸만 눈이 갔다.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합니다.”
이름을 듣자 정신을 차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동그란 선을 가진 머리와 치켜 올라간 눈매가 언밸런스했다. 스쳐지나가기만 했다면 사나운 사람이라고만 오해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듣고, 얼굴을 아주 잠깐 뜯어보고 난 뒤에야 뒤늦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카라스노의 코트 위에서 노닐던 등번호 9번이다. 이미 이 년 전의 이야기였지만, 부끄럽게도 그 이후에 경기를 보러 간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래도 그 때 코트 위의 모든 이들의 존재감은 생생히 남아있었고 카게야마의 수려한 모습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의 등번호가 가장 생생하게 떠오르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웃으면서 아는 척을 했다.
“기억났다. 카라스노의 세터지?”
당연히 카게야마는 어떻게 아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년 전의 경기를 화두에 올리며 짤막하게 입을 떼었을 때,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 케이가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 그만 들어가.” 카게야마는 대번에 불만스러운 눈을 했다. 순간 눈빛에 생기가 차오른 걸 나도 보았을 정도인데, 케이의 한 마디로 눈이 푸르죽죽하게 죽어버렸다.
“왜, 잠깐 쉬는 김에 얘기도 못해?”
미련을 떼지 못한 듯 카게야마가 항의했다. 그래도 나의 동생은 단호했다.
“됐으니까 들어가. 복도에서 얘기하지 말고. 음료는 내가 가져올 테니까.”
묵직한 짜증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심통이 난 것처럼도 들렸다. 그러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 말을 하며 나를 힐끗 쳐다보던 눈에 담겨있던 감정은 분명한 불안감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묘한 감각이 다시 가슴을 솜방망이처럼 두들기고 간다. 카게야마를 변호해 줄 생각도 못하고 내가 서 있기만 한 사이, 카게야마는 케이의 말을 들을 건지 입을 아이처럼 쑥 내밀면서도 순순히 방 안으로 돌아갔다. 케이의 방문이 닫히자 좁은 복도에는 나와 케이만이 남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한 채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집에 있었어?”
“뭐, 나간다고도 안 했잖아?”
“……그러네.”
어제를 짧게 되짚은 듯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나온다. “미안해.”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케이가 먼저 사과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뭐가, 라고만 물었다. 온다는 말도 안 하고 데려와서 미안하다는 뜻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물론 집에 누군가를 들여 본 적 없는 동생이 손님을 데리고 왔다는 점에서 대단히 놀라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고, 딱히 그를 나무랄 생각도 없었다. 나는 용서랄 것도 아닌 용서로 케이의 어깨만 두드렸다. 그저 순수한 궁금증이 앞설 뿐이었다.
“무슨 일로 데려왔어?”
“방학 숙제하러. 연구과제.”
“같이 하는 거야?”
“아니……. 카게야마는 워낙 못 해서, 내가 도와주는 정도.”
거기까지만 대답한 뒤 케이는 ‘그럼 갈게.’ 라고 말하며 나를 지나쳐 갔다. 어딜 보나 도망가는 기색이 역력한 모양새였으나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뿐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놀랐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여러 점에서. 이대로 케이 방의 문을 열고 앉아있을 카게야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내 눈을 보지 않으려던 케이의 얼굴이 떠올라 내 방으로 돌아왔다. 따라가 돕지 않았던 것도 온전히 그를 위해서였다.
2.
여러 상황을 상정해 보았다. 어머니가 아끼던 접시를 깨트렸을 때, 혹은 아껴 먹으려고 꽁꽁 숨겨둔 케이크를 들켜버렸을 때. 케이가 나를 앞에 두고 보였던 표정에 대해서다. 그렇게 아이처럼 초조해하는 동생의 모습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낯설었던 건 표정뿐만이 아니다. 침대에서 반 바퀴 돌아누우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떠올린다. 성나 보이는 인상에 비해 눈빛은 유순했다. 키도 큰 편이었으나 우리 형제보다는 작았다. 머릿속에서 케이의 큰 손이 다시 카게야마의 팔을 잡는다. 하얗고 마른 손.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단단하게 팔을 움켜쥐었다. 작정하고 붙잡은 듯 손톱이 하얗게 질렸다. 카게야마를 나무라면서 아주 잠시 시선이 나에게로 왔었다. 불안한 어둠이 가라앉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널리널리 뻗는 생각의 가지들을 쳐내면서 가슴 속의 위화감이 춤을 추고 있음을 알았다. 그 무렵 내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섣불리 나온 어떤 결론이 내 머릿속을 확 사로잡아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앞서간 건 아닐까? 입을 손으로 가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서 멈췄다. 거기까지 가서야 조금 주제넘었다는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카게야마는 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 우리 형제와 셋이서 저녁까지 먹고 돌아갔다. 나는 평범한 손님으로 대접했고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케이의 불안한 눈이 나를 따라붙는 것을 알았으나 정말 그게 다였다.
나는 케이에게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딱히 조심스러워진 것은 아니고, 그 아이에 대한 내 생각을 그 당시의 케이에게 해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케이에게 필요한 건 나의 평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케이, 요즘 힘들어?”
내가 케이에게 이따금 던진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케이는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똑같은 대답을 건넸다. “딱히.” 어중간한 대답이었어도 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아직은 케이의 눈을 읽을 수 없었다. 침입을 허용치 않는 눈동자가 단단히 닫혀있었다.
이 년이 흘렀다. 케이의 눈에 남아있던 불안감은 다소 사그라진 것처럼 보였다. 케이는 일 년 전 도쿄의 원하던 대학에 붙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타마 현에서 유명한 실업팀에 카게야마 토비오가 입단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3.
사는 지역구부터 달라진 시점에서 동생과 만날 기회는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대학 생활로 바쁜 케이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나와 하는 연락은 대부분이 메신저였지만 어쩌다가 한 번 그로부터 먼저 전화가 걸려올 때도 있었다. 늦은 밤, 내가 잘 준비를 하는 시간. 케이가 먼저 전화를 걸 때는 모두 그런 때였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아도 대화가 많은 형제사이는 아니었다. 때문에 먼저 전화가 걸려온다는 것 자체가 매번 나에게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이제 전화를 받을 때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여보세요?” 먼저 입을 열면, 짧은 침묵 후에는 케이의 사과가 이어졌다. 이런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동생의 말은 몇 번을 들어도 낯설게 느껴졌다.
전화가 올 때마다 통화로 삼십 분 정도를 보냈다. 나누는 대화는 사실상 그리 대단치 않았다. 서로의 밀린 안부를 주고받는 명목이라고 해도 십 분이면 충분했고, 나머지는 그보다도 더 시시한 잡담이었다. 케이는 자신이 전화를 건 입장이라는 걸 고려해서라도 그 때는 더 성실하게 대답해주려는 것처럼 보였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좀 더 쳐져있는 듯 느껴졌다.
케이가 전화를 건 목적이 이런 게 아니리라는 생각은 처음 전화를 받았던 때부터 늘 저반에 깔려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먼저 입을 여는 대신 우선은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런 식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게 자그마치 이 년이나 흘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도 나는 밤에 걸려온 동생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형.」
케이의 목소리가 좁은 방 안에 너울졌다.
“응.”
「나 잘 하고 있는 걸까?」
이 아이가 타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을까. 잠자코 기다려온 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놀라웠다. 어떤 질문이 돌아오든 놀라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 때 곧장 대답해줄 수 없었다. 무작정 믿어주는 것도 옳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케이에게는 맹목이 필요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입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거야.”
겨우 나온 대답은 조금 책임 전가처럼 들릴지도 몰랐다. 그래도 무엇을 바라는 건지 그가 준비를 끝내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말을 아끼고 싶었다.
케이는 「……그래.」 라고만 대답했다. 더 이상 이어질 말은 없어 보였다. 그 때 나는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케이.”
「응.」
“잘 하고 있어?”
정적 속에서 숨이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되돌려 받을 줄 몰랐던 질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던진 말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드물게도 무언가에 전전긍긍하는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래도 조금은 더 오랫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졌다. 케이의 대답은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다.
「…아직은, 모르겠어.」
목소리에는 힘이 좀 더 빠져 있었다. 그러고도 케이는 바로 전화를 끊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나도 별말 없이 전화를 내려놓았다. 조용히 전화가 끊어지고도 마음은 차분했다. 안이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두 번 돌아보는 일 없이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대로 잠들 수도 있었으나 나는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 액정을 켰다. 시린 불빛을 줄이며 검색 엔진을 화면에 띄웠다. 조심조심 액정을 누르는 내 손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을 완성하고 있었다. 자동 완성으로 만들어지는 이름을 클릭하자, 이어서 뜨는 화면에는 배구선수 카게야마 토비오의 간단한 프로필이 완성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정보들을 유심히 훑어보다 살짝 스크롤을 내렸다. 스포츠 뉴스까지 내리자 가장 최근의 기사가 최상단에 떠 있었다. <P기업 카게야마 선수, U21 참전 앞두고 십자 인대 파열>
그 이후 케이에게는 더 이상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한동안 그가 어디에 갔는지 아냐는 전화를 더 많이 받았을 뿐이다.
4.
자그마치 일 년하고도 반년이었다. 생각보다도 여러 사람을 만나며 그런 질문을 들었다. 동생 분 혹시 잘 지내세요? 요즘 연락이 안 닿아서요. 틀에 박힌 듯 똑같은 패턴으로 똑같은 말이 돌아왔다. 그런 이들에게 저도 잘 모른다, 라고 되돌려주면서 나는 새삼 케이의 인간관계에 대해 다소 안이한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타인을 향한 그의 무심함이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 소리도 소문도 없이 홀연히 자리를 뜬 동생의 행방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데, 정작 그 불씨를 만든 장본인은 그런 사람들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취를 감춰버렸으니 말이다. 나무라기보다는 대단한 마음이 앞섰다.
그가 신경 써야 할 한 사람과 그들의 주변 상황을 떠올리면 그 방황과 무심함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한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모든 질문들에게 철저한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라져버린 동생에 대해 내가 해줄 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늘 행동마다 이유가 있는 녀석이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때때로 케이에게 너무 관대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도 무심함과는 달랐다.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가끔 라인을 켜서 케이의 프로필을 확인해 보았다. 반년 전부터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단호한 한마디 옆의 프로필 사진은 언젠가부터 꾸준히 간격을 두고 바뀌고 있었다. 몇 개월을 지켜보다 한 달 단위로 바뀌는 것임을 눈치 챘다. 처음에는 비행기 날개를 기내 창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가, 잔디가 깔린 넓은 터였다가, 싹이 나지 않은 화분이었다가, 303이라는 숫자 태그가 달린 열쇠였다가. 아마도 그가 찍었을 사진들로 프로필은 끊임없이 변했다.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전화조차 받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서는 얄밉게 사진을 바꿔가며 겨우 제 생존 여부만 알려주고 있는 격이었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반년의 시간동안 속이 터져라 걱정했을 이들이 본다면 허무하게 느낄지도 모를 만큼 사진 속의 모든 풍경들은 잔잔한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케이의 소재가 궁금한 건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진들 속에 비치는 단편적인 풍경들로는 도대체 그가 어디에서 지내는지 명확하게 유추해낼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당연하게도, 나는 케이가 카게야마와 함께 있음을 전제로 깔고 있는 채였다. 깊게 파고들지도 않고 그에게 묻거나 떠본 적도 없었으나 케이의 모든 고민과 고뇌들은 전부 카게야마에게서 기인했으리라 어렴풋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한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떨쳐내기 어렵기도 했다. 카게야마를 직접 만났던 것은 그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 여름날이 전부였는데도.
아직도 카게야마의 팔을 움켜잡던 케이의 새하얀 손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와 카게야마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흐릿한 눈동자도 그랬다. 그가 도쿄에 상경한 이후 통화를 할 때도 그런 이야기는 나누지도 않았다. 나는 우스갯소리로라도 그에게 연인에 관한 주제를 건네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만 얘기해 볼까 치면 카게야마의 얼굴이 아롱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꽤나 당황스러운 경험이면서도 의외로 그리 놀랍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어떠한 이유와 관계를 갖다 붙이건 간에 그가 케이의 그늘을 만들어낸 사람임은 거의 확신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가 느껴왔던 침침한 그늘. 그건 한 때의 나에게 낙담하여 지내던 암흑기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케이는 그늘 뒤의 무언가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서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늘 속에 머물기를 택한 것 같았다. 끊임없이 걸려왔던 케이의 전화와 마지막 순간의 질문이, 나와 주고받았던 문답들이 우리 셋 사이에서 소용돌이쳤다.
이미 그 시점부터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결론지었으면서도 나는 섣불리 입에 담으려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었다. 케이는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매달 바뀌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며 묵묵히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내 눈과 입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그만의 혼란을 정리하고 있을 터였다. 닫혀있던 눈동자는 금방 현명한 판단을 내린 뒤 활짝 열릴 것이다.
5.
그리고 다시 봄, 기다림이 일상에 스며들어 점차 무뎌지던 날, 내 사무실 책상에 항공 우편 봉투 한 장이 놓였다. 벚꽃이 유독 늦게 핀 날이었다.
6.
테두리를 타고 파랗고 하얗고 빨간 선이 줄지어져있었다. 여간해선 받을 일도 인연도 없는 봉투에는 반듯한 필체로 내 이름과 사무실 주소까지 쓰여 있었다. 아리송하고 묘한 기분이 앞서 보낸 사람의 주소를 확인했으나 이름은 없고 오로지 주소뿐이었다. 얄팍한 봉투 안에는 또 다른 봉투가 한 장 들어있는 듯 했다. 연필꽂이에서 커터칼을 꺼내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갈랐다. 봉투 안의 봉투도 조금만 빼내 입구를 그어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빼냈다. 첫 번째 봉투에는 다른 봉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내 눈으로 확인한 두 번째 봉투 속 내용물의 정체를 보고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예약한 적도 없는 비행기 표가 내 앞으로 예매되어있다. 비즈니스 클래스로 예매된 표의 목적지는 엉뚱하게도 태평양 너머의 땅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애써 속으로 내리누르면서 우선은 자리에 앉았다. 한참이고 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항공 마크가 새겨진 두 번째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앞뒤로 뒤집어보다 문득 포장을 한 번 뜯었던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 한 번 뜯어서 무언가 처치를 한 후, 다시 밀봉하여 다른 봉투에 숨겨 보냈다는 뜻이다. 혹시 싶은 마음에 뜯은 입구를 바닥을 향해 기울인 뒤 탈탈 털어 보았다. 그러자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메모지가 스르륵 책상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집어서 뒤집어보니 그 위에는 마찬가지로 반듯한 필체로 단 한 줄만이 쓰여 있었다.
마중 나갈게.
다 이해하지만, 갑자기 휴가 내야 하는 내 생각도 좀 해 줬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