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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트와르

Serendipity; 우연치고는 너무나 필연적인


"왕님."

 

내가 지금 너를 부른다면, 너는 나를 기억할까.

 

츠키시마 케이×카게야마 토비오

'완벽한순간'

 

타고 있는 시내버스의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츠키시마는 헤드폰을 올려 귀를 덮었다. 시끄러운 것은 여전했지만 큰 소음은 어느정도 막아주는 것 같았다. 한 손을 들어올려 턱을 괸 후 팔꿈치를 창 난간에 얹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버스 옆을 빠르게 흘러가는 간판들과 사람들을 멍하게 지켜보는데,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웅 거리는 진동소리가 헤드폰과 빗방울 소리에 먹혀들어갔다.  반대편 손이 주머니에 없었다면 휴대폰이 울었는지도 모를 뻔 했다.

 

상태바에 뜬 작은 편지 이모티콘을 보고, 츠키시마는 자신이 아직도 앱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알림을 오른쪽으로 밀어 지웠다. 그리고 메뉴를 눌러 쓰지 않는 앱만을 모아놓은 폴더를 열었다. 스크롤을 가장 밑으로 내리니 '랜덤 채팅' 이라는 어플이 보인다. 아이콘 위 조그만 숫자 1이 눈에 거슬렸다. 그냥 삭제해버릴까. 그는 고민하다 일단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버스 문이 열리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비가 그야말로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있는 장우산을 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가방에 넣었다. 조금 뒤부터는 비가 양동이째로 붓는 듯이 내렸고, 그는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그래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잔뜩 젖어버려 눌러붙는 티 위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방끈 때문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축축한 채 현관문을 연 그는 가방을 침대위에 던져놓고 바로 욕실에 들어갔다. 

 

끕끕한 빗물을 씻어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츠키시마는 아이팟 속 노래들을 정리하다 문득 아까의 채팅어플이 떠올랐다. 삭제하기 전 확인해야할 것만 같아 급하게 휴대폰을 찾았다.

 

그런데 휴대폰을 어디에 뒀더라.

 

그는 세탁기에 이미 쑤셔넣어버린 바지가 떠올라 순간 흠칫했다가, 이내 가방에 있는 것을 떠올리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가방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시트를  살짝 적신 채였다.

 

그는 젖은곳을 살짝 피해 편하게 자리잡고 누웠다. 쪽지는 두 건정도 더 와있었다. 모두 한사람으로부터 온, 그것도 아까 버스에서 보낸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 쪽이 원하시는 타입일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장신에 흑발, 눈매는 살짝 사나운 사람을 찾고 계시던데...

 

-읽으신 후에 꼭 답해주시길 바랍니다.

 

상대방의 이름은 '9' 였다. 프로필을 보니 진짜로 자기소개란에는 결코 작다할수없는 키와  머리색, 눈매모양이 적혀져있었다. 3개밖에 적힌게 없었지만, 츠키시마는 꽤나 빠르게 답을 보냈다. 몇 분 뒤에 답장을 보내오는 상대는 말투에 귀염성이라곤 하나없는 어리버리한 사람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그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상대가 미리 가 있는것인지 카운터는 그에게 마스터키가 아닌 보조키를 건넸다. 키 위에 붉게 적힌 1109라는 숫자는 묘한 위화감을 일으켰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전광판의 숫자를 올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츠키시마는 점점 높은 곳으로 달아오르는 숫자가 마치 제 심박수같아 11층에 도달할 때 즈음에는 관성에 의해 혈관이 펴지는 이완됨이 긴장감으로 느껴지는 것이 나름의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자 훅 들이차는 복도의 락스냄새가 긴장을 더했다. 아무리 오랜만에 랜덤 상대를 만났다하더라도 제 상태는 저가 판단하기에도 생소했다. 복도를 걸었다. 두 칸만 지나면 이제 1109호의 문이 나올 것이었다. 그는 상대의 귀염성없는 말투와 살짝 올라간 눈매를 생각했다. 알 수 없는 벅차오름- 틈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것을 고스란히 느낀 츠키시마는 곧바로 머릿속을 비우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내 후회했다.

 

삐빅,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너머는 깜깜했다. 불 한점 켜지지 않은 실내는 현관 앞 짙은 주홍빛의 자동 불빛이 꺼지자 더욱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잠깐동안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고 있는 동안 그는 미리 와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상대가 없어 조금 실망했다. 허탕이었구나, 착각이었구나. 아까까지 미친듯이 팔딱거리던 심장이 죽어버린 듯 고요해졌다.

 

막 제자리를 찾은 손잡이를 다시 내려 문을 열려하자, 건너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람 있으니까 가지 마세요. 제가 '9' 입니다."

 

환청인가. 왜 저 목소리가 여기서 들리는 거지.

 

"저는 불을 끄고 하는 주의라서요. 혹시 불편하신가요?"

 

한마디를 더 들으니 확신이 선다. 재세동을 건것처럼 심장이 살아난다. 아니, 전혀 불편하지 않아.

 

츠키시마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바닥을 밟았다. 약간의 온기가 도는 것이 미리 난방을 켜두었던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게 배려심을 베푸는 것이 정말로 그가 맞는지에 대한 얕은 의문감을 가져왔다.

 

앞으로 걸어가자 희미하게 흰색 침대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몸을 올리고, 시트가 꺼지는 것이 천 너머로 느껴졌다. 손을 뻗어 잘 보이지 않는 인영을 살짝 건드렸다. 짤막하게 잘라져 동그랗게 보이는 머리, 손으로 빗어내려도 한 점 걸리지 않는 머리칼, 창밖의 빛으로 인해 드문드문 비치는 남색의 눈동자, 정말로 그였다- 카게야마 토비오.

 

좀 전까지 느껴졌던 위화감의 근원을 찾아냈다. 끝끝내 그를 잊지 못한 마음이 자연스레 그를 찾아냈던 것인가,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겨우 몇글자로 화면 저편의 사람이 그와 똑 닮은 것을 깨닫고 직감적으로 끌려와, 랜덤 채팅으로 만나다니. 이렇게 우연하게 만날 줄 몰랐던 몸은 멋대로 뻗어나간 자신의 가지에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어느새 자신이 손을 내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잡고 있었던 것인지, 카게야마는 그의 손을 쳐냈다. 내쳐지는 순간에도 조밀하게 근육진 그의 손이 여전히 자신은 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뭐하시는 거죠."

 

"하실 마음 없으시면 가세요."

 

아니다. 지금은 그와 몸을 섞는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고민했다.

 

카게야마, 내가 지금 너를 부른다면 너는 나를 기억할까.

 

"왕님. 여전히 쌀쌀맞으시네요."

 

상대는 소매 단추를 채우던 손을 멈췄다. 지금 뭐라고, 그는 등지고 앉은 몸을 반대로 틀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츠카시마에게도 마찬가지로 비춰지고 있을 눈의 색은 탁한 금색이었다. 그제서야 카게야마는 상대의 전신을 보았다. 190에 가까운 장신중에서도 눈에 띄는 장신, 특유의 검정색 뿔테 안경.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츠키시마 케이였다.

 

2년 전 쯤, 삐딱거리는 태도로 저를 불러내어 한치의 굽힘없이 고백을 한 츠키시마는 1초의 망설임도 갖지 않은 거절멘트를 마지막 대화로 삼고 그의 곁을 떠났다. 한참 뒤에서야 카게야마는 자신이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 그 상황에서는 '차버린 것' 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상대가 없어진 그는 반강제적으로 혼자인 채 남겨졌다.

 

"남자가 남자랑 어떻게 사귀냐고 물어본 사람이, 남자랑 남자랑 몸을 섞을 생각을 하고 계시네요."

 

"그건,"

 

"귀족 자제분의 취미가 대체 언제부터 이런 서민 유흥문화 중에서도 가장 끝자락까지 몰락해버렸을까나?"

 

아아, 당황하고 있다. 눈동자는 고정되어있어도 자리를 잡지못한 동공의 떨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양쪽 입꼬리가 굳는 것도 여전하다. 매번 표정을 숨기지 못해서 작년 마지막 경기 때에도 꽤나 고전했었다지 아마. 상대에게 전술을 읽혀버리곤 했으니까.

 

"아니야, 정말로 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 처음이었어."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증명해줄 방법은 없지만, 정말로 오늘이 처음이었어."

 

서로 원하는 타입이었던 적은 처음이었거든. 내 프로필 안읽어봤어?

 

그는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져버린 츠키시마를 찾기 위해 어플을 깔았더랜다. 사람을 만나는 용도가 아니라 찾아주는 용도인 줄 알고 그전까지는 몰랐던 스마트폰의 위대함도 느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런 어플인지도 모른채 찾는 유형에다 '탁한 금색, 혹은 옅은 모래색 머리칼에 짙은 황색의 눈. 키는 188정도' 라고 저장해두었다가 츠키시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프로필에는 '장신에 흑발, 눈매는 살짝 사나움' 을 업로딩했고, 그 프로필 마저도 고등학교 시절 츠키시마가 자신에게 자주 말했던 외향 묘사를 적었다고 말했다.

 

왕님은 밑도끝도없이 멍청하네.

 

태클을 걸어오는 츠키시마의 말을 잘라먹고 카게야마는 할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주려는 모습이 지금까지 봐왔던 카게야마보다, 오랫동안 보지못해 그리워한 카게야마보다 예뻤다. 츠키시마는 이제 그에게 감히 자신인지도 모른채 이번에는 타인과 몸을 섞으려 한 그의 발칙한 행동에 대한 변명을 요구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비죽 내밀으며 답했다. 자신은 너가 찾던 사람의 유형이었고, 츠키시마는 자신이 찾던 사람의 유형이어서 이번에는 정말 작정하고 왔다고. 그래도 차마 불을 켜고 하기에는 부끄러우며 난생 처음이라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그냥 갈까말까 수천번은 고민했음을 강조했다. 그는 그것에 더하여 지금까지 자신에게 대화 걸어온 사람들을 어떻게 거절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서술해주었다.   

 

곁눈질로 흘금흘금 츠키시마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말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없는 츠키시마때문에 점점 초조해져갔다. 그는 어떻게든 그의 화나보이는 모습을 없애기위해 카게야마는 더 남은 할말도 없이 무턱대고 츠키시마에게 말을 붙이려 했다.

 

"잘 들었어, 왕님. "

 

"어어..."

 

"그래서, 지금은 어떤건데?"

 

"뭐가."

 

"아직도 남자랑 남자가 어떻게 사귀어? 라는 식의 대답을 할 건 아니잖아."

 

"그렇겠지."

 

"그럼 그 때 했던 질문, 지금 다시 할게. 너도 지금 대답해줘."

 

빙글빙글 웃는게 아주 능글맞다. 굳이 말로 해야겠어, 말 들으면서 다 알아챈 주제에.

 

츠키시마는 궁시렁대는 카게야마의 양 볼을 잡았다. 왕님 놀려먹는 재미라도 있어야 서민들이 그들의 한참 질 떨어지는 삶을 그나마 즐겁게 보낼 수 있지 않겠어?

 

그는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얼굴의 속눈썹을 검지로 살살 넘기다 그 위에 모이쪼듯 입을 대었다 떼어내었다. 일순간 홧하고 카게야마의 두 뺨이 달아올라 손까지 열기가 건너왔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당황하여 어버버 거리는 입술 위에 한번 더 입을 대었다가 차마 떼어내지 못하고 빨려들어오는 부드러운 감촉을 남김없이 혀로 핥아냈다. 뭉근하게 겹쳐오는 입술이 생경하여 지금이 현실임을 알려준다.

 

사랑해, 토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