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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혜음

완벽한 순간

1.

카게야마는 바보였다.




그렇다고 마냥 바보라고 단정 지을 수만도 없었다. 경기에 집중할 때 만큼은 하염없이 잠재된 천재성을 빛냈다. 빛나는 눈은 영롱한 무언가와도 닮아있었고 공을 만질 때의 표정은 항상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유는 그가 배구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코트 위의 제왕이라고 불렀다. 그의 주가는 항상 상승가도를 달렸고 주목받았다. 사람들의 반응도 열띠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가 싫었다. 아니, 너를 좋아했나.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나아버릴 한낱 감기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차리면 없어져버릴 것. 그런 것들의 공통점은 별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카게야마 같은 천재라면 혹시 모르는 일이지만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길 배구는 앞길을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최선의 플레이를 한다. 천재적인 뇌를 가동하고 막힘없이 공을 보낸다. 경기를 할 때 빼고는 어느 곳에서나 제 쪽은 절대 의식하지 않았다. 감이 왔지만 그만 오기가 생겼다. 누구라도 깨끗한 건 망가트리고 싶은 게 맞았다. 언제나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길을 만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왕님."



익숙한 호칭에 카게야마는 이제 따라붙는 말 없이 저를 응시했다. 나를 좋아해? 저는 미리 알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꼭 치부를 들킨 것 처럼 화들짝 놀라는 게 재미있었다. 왜 그래, 어차피 왕님도 들키길 바랬잖아. 2세트가 곧 시작됨을 알리는 휘슬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는 모두 둥글게 모여섰다. 의도적으로 드러난 뒷목에 손을 얹자 물기 어린 맨살 아래 여리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심장도 같으려나.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을 떼어 손에 옮긴 땀을 바지 춤에 문질러 닦았다.


타교와 연습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그 날 제 말을 듣고 포커스가 깨진 카게야마는 서브미스 만으로도 몇 점씩을 실점했고 저는 그 날따라 연속 득점을 하는 쾌거를 거뒀다. 어쩐지 쾌감에 몸이 가벼웠다. 몰락한 제왕. 결국 교체된 카게야마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온종일 벤치에만 앉아있었다. 결과는 초반에 1세트를 따냈음에도 패배였다. 한 명이 빠졌다고 해서 경기에서 아예 져버리다니. 더욱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카게야마, 얼른 나와! 다들 벤치에 앉아있던 카게야마 걱정을 했는지 먼저 나가며 외쳤다. 그가 앉은 벤치 앞에 섰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의식했는지 손을 말아쥔다. 붉게 뭉그러지는 살갗에 손톱이 파고 들 것만 같았다.



"오늘 너 왜 그래? 이길 수 있었잖아."



모두들 이걸 위해 그동안 준비 해 온 거잖아. 내 말이 틀려? 의도적으로 비꼼이 가미된 말이었다. 적대심이 깃든 눈이 요동쳤다. 답은 뭐라고 할까? 모두 나 때문이었다고 책임을 돌릴까? 무작정 화를 낼까? 공백이 좀 길었다. 지루함에 몰래 손으로 장난을 하니 곧 답이 왔다. 기대를 했다.



"사람 가지고 장난하지 마."



허무맹랑하게도 그는 네 어절을 내뱉었다. 앞 말과 아무 관련도 없었다. 그 전에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말은 입과 분리되어 동동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 크게 웃음이 났다. 내가 장난을 했다고? 매섭게 눈을 치켜뜬 카게야마가 인상을 쓰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나 좋아하면 말 하지. 누군가 좋아하는 건 기쁜 일이잖아. 그렇지? 두 번씩이나 같은 소리가 반복된 성의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리고 나도 기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조금은 숨 가쁘게 네가 뒤를 돌았다. 서툴게 어깨를 쥐고 얼굴을 가까이 해도 더 이상 밀어내지 않는다. 지루해. 바로 입을 맞부딪혀 발갛고 길다란 살덩이를 남김없이 밀어넣고 타인의 입 안을 맘껏 탐닉했다. 다만 '화풀이'의 정도가 조금 심한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눈을 살곰 뜨니 꽉 감은 눈에 붉어진 얼굴이 꽤 볼 만 했다. 고작 열 일곱. 타액의 맛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썼다. 간질간질하게 검은 머리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자꾸 스쳤다. 그 바람에 잠깐 하던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2. 

도망쳤다. 아직 생생했다. 조심했는데. 들키지 않게 그렇게 감췄는데. 엇물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비리다. 너는 무슨 생각인걸까. 저를 좋아한다는 쪽으로는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헛 된 꿈은 아예 꾸지 않는 게 옳았다.

처음으로 경기 중 다른 생각을 했다. 그래서 팀에 방해가 되었다. 다음 1점. 내 어깨를 툭 치는 너를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우연이었기를 바랬다. 네가 내게 거는 장난 같은 것. 그것처럼 그냥 홧김에 저지른 일 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기엔 닿은 감촉이 눈 앞에서 너무나도 야살스럽게 재생되었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후끈하도록 불이 질러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빠르게 불이 번져버렸다. 손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게 손을 쓰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차에 오를 때에도 간섭은 계속되었다. 뭐야 왕님. 설마 이제 자리도 헷갈리는 거야? 여기잖아. 본래 제 자리였던 히나타의 옆자리는 야마구치가 꿰차고 있었다. 도쿄에서 미야기 현 까지는 적어도 네 시간이 걸렸다. 지금 네 시간 가량을 이 자리에서. 눈 앞이 캄캄해 짐과 동시에 등이 떠밀렸다. 얼른 출발해야 하니 앉아주세요. 모두 피곤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차 안에서 한 숨도 자질 못했다. 1세트 밖에 못 뛴 건 사실이지만 체력소모는 여느 때보다 컸다. 목 뒤와 척추가 뻑뻑하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편하게 뒤로 기댄 네 옆자리라고 저도 마저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나절이 지나 도착한 학교 앞에 차가 멈추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 어디가? 학교 안에 두고온 게 있어서. 저는 아마 도시락 통을 가져와야 했다.



교실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왔다. 걸어가기는 집이 너무 멀었다. 또 저는 묘한 카레 냄새가 나는 도시락 통을 안고 있었다. 적시기는 아무래도 싫었지만 또 다시 어쩔 수 없었다. 품에 도시락 통을 숨기고 빗 속을 뛰었다. 너도 비를 맞고 있을까. 어쩐지 자신이 비참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머리 위로 우산을 든 그림자가 드리운 건 아무래도 제 상상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토비오쨩, 여기서 뭐해! 감기에 걸려요! 그제야 현실인 걸 믿었다.



"오이카와 선배..."


"그런데. 꼴이 그게 뭐야?"



꼭 운 것 같네. 카게야마가 고개를 화들짝 들더니 얼굴에 줄줄 흐르는 빗물을 얼른 쓸어내렸다. 눈가가 붉어진 것 같다. 빗물인가.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비를 맞은 몸이 찰 것 같다. 뺨에 손을 갖다대자 역시 냉기가 전해져왔다. 아직 다 여물지 않은 피부가 희게 질려있다. 거기에 마음이 동해 조금 고민했다. 이렇게 더 비를 맞았다간 정말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데려다 줄 테니까 이리 와. 그런데 그보다 더 찬 손이 제 팔꿈치를 다급히 부여잡았다. 절실한 표정이었다.



"저 좀..."


"응?"



저 좀 도와주세요. 곧 울음이 터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꼭 울음이 터져야만 할 것 같았다.





3-2.

이제 여름이라는 걸 알려주듯 장대비가 내렸다. 벌써 2주 전, 아니, 3주인가. 조금 흐릿한 기억을 되새김질 했다. 카게야마는 저에게서 도망쳤다. 부활동중에만 모습을 비추고, 말을 걸라 치면 저 쪽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도망쳐도 사실 뻔할 뿐이었다. 빈 체육관에서의 사실은 아무도 몰라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금은 마음을 놓은 게 사실이었다. 너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니까. 그냥 그렇게 치부했다. 

카게야마는 부활동이 끝나면 무조건 집이 아닌 세이죠로 향했다. 누구에게 갔으려나. 쿠니미, 아님 킨다이치. 오이카와 정도. 꼽아보니 경우의 수는 서넛정도 되었다. 오늘은 얘기 해 봐야겠다. 다루기 간단한 만큼 카게야마는 단순해 조금 겁을 주면 덜컥 도망가버리기 십상이었다. 기분이 바닥을 쳤다. 손 끝까지 경련이 일 것 같았다. 최저를 치닫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노래가 클라이막스를 달렸다. 귀에 들리지 않는 노래를 들으려고 해봤자 머리 아픈 이명만 번졌다. 나름 좋아하던 노래였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듣게 될 것 같다. 결국 노래를 꺼버리고 말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노래가 나오지 않는 헤드폰을 빼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노래 대신 재잘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세이죠 여학생들. 그 나잇대 여학생들 다웠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명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려는 걸 억누르고 말을 이어간다. 마치 경악에 찬 목소리다. 맞아, 그 검은 머리 애. 말도 안돼.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숨이 차 있다. 장담하건대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건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관계성이 분명했다. 제게서 도망치더니 결국 오이카와에게 간 모양이었다. 그치만 봤는 걸. 더듬대는 목소리는 확연하게 커졌다. 가속이 붙었다. 곧 거세게 부딪혀 어딘가에 불을 낼 모양새였다.



"그 애가 토오루와,"



키스하는 걸. 들은 여자애는 충격에 울먹였다. 그럴 리가 없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만 남자와 남자인 걸. 머리 둔치를 몇 대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분명히 봤어, 세이죠 체육관에서 그러는 거!"


"거짓말..."



거짓말. 휴대폰을 꺼냈다. 정말 그랬을 리가 없잖아.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지나치게 동경하긴 했어도 둘 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정도는 지켰다. 긴장이 녹진하게 흘렀다. 머리는 깨질 것 같이 아팠다. 제발. 연결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고 얼결에 휴대폰을 떨구었다. 휴대폰 위로 빗물이 덮혔다. 명백한 거부의사였다.





3. 

어제도 오늘도 비가 왔다. 역시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어느새 젖은 머리 위로 수건이 덮혔다. 세이죠의 체육관에 사람이 조금씩 줄어간다. 서브 보여줄게. 흔치 않은 기회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어도 어쩐지 집중은 잘 되지 않았다.


벌써 일주일. 쿠니미는 저번 주에 찾아온 저를 보고는 일주일 내내 데리고 다니다가 시험 기간이 되어서는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쿠니미가 사라진 뒤로 유일한 도피처가 된 오이카와의 입에서는 자꾸 웬 생뚱맞은 말이 나왔다. 왠만하면 이해 해 보려고 했지만 들을수록 무슨 뜻인지 몰랐다. 토비오쨩도 이제 알겠지? 우린 어린애가 아니란 걸. 당췌 의미심장한 말을 해 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공을 쏘아올리고 달린다. 서브만 다섯 개 째. 예전에는 앞에서 보여주지도 않던 서브가 벌써 몇 개 째 날아간다. 평소보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는 것 같지만 알 수 없다. 여느 때보다 강하게 꽃힌 서브는 아슬하게 네트 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집중할 수도 없다. 벌써 이런 의미가 내포된 말은 오늘로 세 번째였다. 자신도 그 정도는 알고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카게야마는 무언가 더 느꼈다. 각박하고 격하게 저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아님 그 반대로 무서울 정도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반대임에도 조금은 비슷했다. 모순적이었다.



"우린 언제까지나 나이 열댓 살 먹은 코흘리개가 아니잖아?"



아니, 조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 것도 같다.



"언제까지 도망다닐거야?"



조금은. 

그러나 대답은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아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거야.



"알겠어?"



어렵다. 등을 지고 서 있는 저와 츠키시마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마음을 움직여버릴 힘따위 제게는 원체 없는 것이었다. 



"선배."



전 모르겠어요. 오늘도 또 모른척을 했다. 토비오쨩은 도통 말이 안 통한다니까. 믿는 건가. 어깨를 으쓱대는 제스쳐로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그에 웃음이 났다. 사실 돌아가기 무서운걸요. 그렇지만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교묘한 구석이 있어."



눈을 부러 치켜 뜬다. 옆을 지나친 오이카와가 정확히 카트에 공을 던져 넣는다. 아니, 차라리 믿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이제 마칠까. 연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의미이던지 간에 저는 약한 동의를 표했다.



"토비오쨩, 있잖아. 부탁이 있어."


"뭡니까?"


"오이카와상의 미션."



중요하니까 비밀은 꼭 지켜야 해. 눈높이가 같게 조금 허리를 숙인다. 어쩐지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있지, 이런 건 조금 장난치는 거 뿐이니까. 정말 아무한테도 알려지면 안 돼. 볼이 붙들리더니 붉은 두 점막이 엉겨 붙듯 달라붙었다가 작은 소리로 떨어졌다. 살풋 내려앉는 꽃잎 같았다. 무뎌지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뒤늦게 소름이 끼치고 거부감이 밀려오면서 온 몸이 공포에 질렸다.




너만

비밀을 지키면


아무도



몰라


이제 얼른 가. 어느덧 비가 그친 밖으로 상황파악도 못 하는 토비오의 등을 떠밀었다. 오이카와가 탐욕스럽게 침을 삼켰다. 연정을 품는 토비오라. 반감이 들어 이상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금은 흥미로웠다. 냉혈한 천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싶었다. 먼저 도와달라고 한 쪽은 토비오였으니까. 무턱대고 휴대폰을 집어 전화를 걸었다. 있지,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죄책감은 잠시 잊었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두 가지 뿐이었고 부딫히느냐 도망치느냐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모든 게 괜찮을 줄만 알았다. 희롱되었다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몸이 휘감기면서도 큰 일탈을 했다는 마음에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러움이 복받쳐올랐다. 몸도 마음도 곤두박질 쳐 엉망이었다. 네가 필요할 때에 너는 옆에 없었다. 길은 두 갈래였고 저는 나침반 하나 없이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깜깜해서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내 손을 좀 잡아 줘. 마침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고 저는 제게 신호를 보낸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츠키시마 케이. 그만 식은 손으로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4.

아무 곳에도 없다고 했다. 체육관에도, 오이카와에게도. 토비오쨩은 벌써 두 시간 전에 체육관에서 나갔어. 느긋한 목소리는 카게야마가 어디로 갔을지 가늠하는 듯 했다. 기억하길 세 갈래 중 가운데 방향으로 뛰어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선택지가 많아진다. 현기증이 잠깐 일었다. 그 동안 집도 몰랐다는 것도, 지금 제가 이렇게 찾고 있다는 것도 조금 분했다. 그런 후에야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카게야마는 동네 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단순한 머리만 해도 그랬다. 똑같은 패턴이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저번에 온전히 본인 실책으로 경기에서 졌을 때는 꼭 이 곳에 있었다. 여기 있으리라 반 쯤 확신했다. 벌써 둥근 뒤통수가 보였다. 분명 여기라면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온 것이었다. 아님 제가 찾아 오길 기다린 것인지도 몰랐다.



인기척에 고개를 뒤로 느릿하게 돌리다가 다시 정면을 본다. 제가 올 줄 알았다는 눈치다. 할 말이 있나. 머리칼에 물기가 조금 어려있다. 단정한 뒤통수가 숙여지며 드러난 뒷목이 순결하게도 새하얬다. 외진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분명 제가 저 곳을 만졌었나. 감촉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 되지는 않은 일인데 기억은 어쩐지 옅다. 

먼저 사과를 해야했다. 모든 게 실수였다고 말하려는 순간 카게야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묘하게 생각한 것과 들어맞는 표정으로 뒤를 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긋지긋해."


"뭐라고?"


"이제 숨도 못 쉬겠어."


"..."


"이런 걸 원한 거야?"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분명 미안하다고 할 것이다. 사과의 연한 미소를 내 보일 것이다. 도망치려던 게 아니었다며. 그러면 안아주려고 했는데. 아니었다. 너는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아니. 타의 반으로 대답을 하니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순식간에 네 안에서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손 쓸 겨를도 없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붉어진 얼굴을 한 네가 악을 썼다.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목에 핏대가 섰다. 놀랄 겨를도 없이 두 손이 제 상체를 아프게 밀쳤다. 작지 않은 힘에 밀려난 뒤 조금 멀리서 보니 그제야 상처 받은 얼굴이 보인다. 입술을 뜯은 자국을 타고 피가 고여있다. 눈동자에 고요한 분노가 일렁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었다.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마음처럼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 심장이 조금 덜컹였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죄의식에 네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넌 나같은 걸 좋아하니. 다시 네 나직한 말에 뱃속이 후끈했다. 알고 있었나. 혀가 좀처럼 식지 않고 더워지는 것 같다. 잠시라도 눈앞의 너를 잊는 방법을 모르겠다. 너를 보면 갈증이 나며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그럼에도 네가 꼭 시야에 들어왔다. 징그러운 인생이었다.


생각해야 했다. 뭐든지. 널 설득시킬 방도를. 정신이 없는 뇌리 틈과 틈 사이 주위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알았다. 매일 보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낮선 하늘에는 별조차도 하나 떠있지 않았다. 매미소리도 풀벌레소리도 전무했다. 그 바람에 몰아쉬던 숨소리를 들킨 것도 알았다. 시간도 공기의 흐름도 의식도 멈춘 바로 그 시간. 더 이상 비극적인 건 싫었다. 너는 왜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걸까. 검푸른 눈동자가 밤을 닮았다. 달빛이 부드러이 내려 네 눈가에 어룽졌다. 가까이에는 늘 답이 있는데.



"네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너 때문에 모두 엉망이야."



밤을 설치고 또 설쳤다. 불안함과 절망이 잠을 모두 이겨버렸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매번 이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기억하고 또 기억해도 츠키시마는 잊어버릴 것이다. 모두 잊어버리고 훗날에 이 시절 따위의 저는 기억에조차 존재하지 않겠지. 그래도 그 때, 가슴이 뛰었던 한 시점에 하루종일 몰두하고 마음을 쏟았다. 그러다가, 그제서야 아무도 마음 써주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남은 시간에는 혼자 자신을 꼭 끌어안아줬다. 다 타고 남아 검게 물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울었다. 아팠기 때문에. 하루의 시작과 끝이 너와 나였다.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모든 스위치를 암전해버렸다. 네 세계에 발을 들인 대가였다. 난 이미 너 뿐인데. 밝고 어두운 빛이 한 줄기도 남김 없이 죽어버렸다. 그제서야 저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다. 두려움에 이제 이 암흑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발도 떼지 못했다. 그럼에도 저는 불꽃을 멸한 이의 손을 잡았다. 나를 데려가 준다면. 너 외에 아무 것도 없어도 괜찮았다. 조금 빨라도 괜찮아. 내가 맞출게. 내가 노력하면 되잖아. 함께하면 뭐든지 다정히 품에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던 때가 있었다. 떠안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리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걱정 않았다.



"근데 난 아직도 네가 좋아."



항상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 되고싶었어.


그래서 지금은 너무 아파. 위태로운 눈앞의 상대가 이제야 경계를 풀고 저에게 왔다. 둥근 뒤통수가 내려다 보이고 이마가 제 어깨에 힘없이 무게를 실었다. 검은 머리칼이 어깨 위로 조금 흩어졌다. 어깨가 조금 젖은 걸로 부벼 닦은 눈 안에 마저 빗물이 가득 고여있는 걸 알 수 있다. 너는 모두 제게 내려놓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너를 괴롭힌 건. 잘 대해 주지 못한 건. 허락 없이 널 가지려고 했던 건. 가만히 그 때의 너에게 의식을 옮겼다. 아니야.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저 너를. 감기는 아직까지 낫지 않았다. 오늘도 벌써 열이 끓었다. 뜨거워 견디지 못 할 만큼 지독하게 아파서 군데군데 열꽃을 피워냈다. 나는 어쩌면 너보다도 괜찮지 않았다. 네가 그만 부서져 버릴까 봐 어쩌지도 못 했다고 도망치며 말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는 너도 나도 모른 척 했다. 못된 짓을 한 것도 아픈 말을 한 것도 모두 제 잘못이었음을. 그제서야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늘어 놓았다. 숨겨만 놓아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이제 네 뒷머리를 죄의식 없이 감쌌다. 미안해. 용서 받는 순간에는 제가 꼭 이제 날아가 버릴 천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부터 내가 망쳐 놓은 네 마음을 단장해야 했다. 저로 인해 온통 뒤덮인 새까만 재는 예쁜 꽃밭의 거름으로 사용될 것이었다. 꼭 아픔을 감추어 버릴 필요는 없었다. 이젠 꼭 좋은 일만 있을 테니까. 어제 만큼, 아니 어제보다. 



"좋아하니까."



지금처럼만



내 

옆에

있어


그러자 마지막으로 범접할 이 하나 없는 너와 나만의 완벽한 순간에. 결국 제게 비열함을 심은 신에게 경탄을 표했다. 그는 무너져내리며 기어코 참은 눈물을 쏟았다. 끝없이 영락을 거듭하며 우리는 그렇게 죽어가겠지. 허망감에 잠식당한 제 온 우주를 더듬대며 품에 안았다. 몇 번이고 돌아오게 되어있는 내 것. 다시는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하는 다짐, 이게 너를 위한 최선임에도 저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너는 나를 떠날 수 있을까. 순간 무거운 공기가 온 몸을 압도했다. 하지만 네 눈엔 내가 담겼고 내 눈엔 네가 담겼다. 그것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