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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치

완벽한 순간





토요일의 오후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교과서를 샤프로 마구 두들기던 카게야마는 유독 조용한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지금이 말로만 듣던 키스 할 타이밍이라는 것이라고, 한 번도 입 맞춰본 적 없는 주제에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때는 해가 뉘엿뉘엿 져갈 무렵 둘밖에 없는 고요한 집, 좁은 좌식 책상에 나란히 딱 붙어 앉은 키 큰 멀대들, 카게야마의 공부를 봐주다가 피곤했는지 등 뒤의 소파에 기대어 졸고 있는 츠키시마 케이. 그 순간 카게야마는 자신이 공부 중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대신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가슴께에서 이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 어울리게 새근새근 아기처럼 졸고 있는 츠키시마의 얼굴이 바로 제 어깨 근처에서 움찔거렸다. 쿵, 쿵,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조용하던 심장이 어느새 크게 박동하여 온몸을 울렸다. 평소보다 더 안 돌아가는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수백 개의 생각이 엉망으로 엉키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더 그윽하게 내려앉은 노을이 카게야마의 몸을 비켜나가 츠키시마의 얼굴 위로 따듯한 색감을 띄며 드리웠다. 창밖에서 시끄럽게 짹짹거리던 새들이 푸드득 어디론가 날아갔다. 카게야마의 손가락에서 떨어져 나간 볼펜이 도르륵 책상 밑으로 떨어져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빙그르르 굴렀다. 유일하게 거실에 걸려있는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 소리가 째깍, 째깍, 카게야마의 심장 소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점점 크게 들렸다. 마치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무엇에 홀린 듯 카게야마의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느릿하게 다가가며 츠키시마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띄웠다. 그리고 그 순간 때마침 츠키시마의 나른하게 가라앉았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곧 두 개의 시선이 코앞에서 마주쳤다. 츠키시마와 눈이 마주친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놀람에 커다래졌다. 츠키시마의 눈동자도 뒤늦게 커다래졌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노을이 내리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느릿하게 입술이 맞닿아서,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

“……!”

ㅡ쿠웅.


순간이었어야 했다. 쿠웅. 카게야마가 뒤로 밀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하는 소리를 낸 츠키시마의 펼쳐진 손바닥이 움찔거렸다. 아날로그 시계의 째깍, 째깍, 소리마저 귓속을 파고들지 못하는 정적이 흘렀다. 밀쳐낸 사람도, 밀쳐진 사람도, 둘 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츠키시마는 평소에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당황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마찬가지로 수백 가지 생각으로 가득 꼬여 있던 카게야마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아니, 잠깐.”


뒤늦게서야 츠키시마가 답지않게 쉽게 말을 잇지 못하며 급하게 카게야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눈에 띄게 어깨를 크게 들썩인 카게야마가 반사적으로 잡힌 팔을 쳐냈다.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눈동자를 굴리며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어, 어, 나 공부 다 했으니까, 간다. 결국, 카게야마는 누가 봐도 어색한 모습으로 츠키시마의 집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뒤에서 얼핏 부르는 소리가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듣지 못했다.


아, 아. 무슨, 내가 방금, 무슨 짓을…. 문이 잠궈지지도 못한 채 덜렁거리는 열린 가방속이 텅 비어있었다. 츠키시마의 집에 펼쳐져있을 하얗게 비어있는 교과서처럼, 카게야마의 머리가 새햐얬다. 골목길을 빠른 속도로 뜀박질하는 카게야마의 흔들리는 새하얀 머릿속으로 시꺼멓게 안 좋은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번졌다. 어떡하지. 거절, 당했다. 방금, 완전히 거부당했어. 카게야마의 가슴께부터 머리끝까지 아까전과 다른 의미로 어지럽게 울렁거렸다. 가슴께가 마구잡이로 따끔거렸다.


완벽하게 어긋난 순간이었다.








완벽한 순간

츠키시마 케이x카게야마 토비오








***

“카게야마가 이상해요….”


히나타는 결국 겁에 질린 모습으로 엔노시타에게 호소했다. 이상하다니? 엔노시타가 히나타에게 되물으며 카게야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체육관 벽에 기대어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엔노시타에게 히나타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이 보았던 카게야마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히나타의 얘기는 이러했다.


먼저 히나타가 카게야마에게 처음 이상함을 느꼈던 것은 점심시간에 언제나처럼 자판기에서 우유를 뽑던 카게야마를 봤을 때였다. 웬일로 두 손가락으로 누르지 않고 한 손가락으로 정상적이게 우유를 뽑은 카게야마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멍한 표정으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이내 옆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은 카게야마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한 손에 빨대를 쥐었다. 그리고는 맹하니 우유팩 위로 빨대 끝을 쿡쿡 내려 찍기 시작했다. 잘 들어가지 않는 듯 아마 수십번은 빨대를 내리찧었을 그때, 야마구치와 츠키시마가 마침 그 옆을 지나가다가 그런 카게야마를 보았다. 잠시 츠키시마를 힐끔 쳐다본 야마구치가 쭈뼛쭈뼛 카게야마에게 다가갔다. ‘저기, 카게야마?’ 그제야 카게야마는 정신을 차리고 야마구치를 올려다보았다. 야마구치는 멋쩍은 얼굴로 뒷목을 갉작이며 말했다. ‘그, 우유 말인데…. 반대로 뒤집혀있는 거 같은데?’ 뒤늦게 카게야마가 우유팩을 내려다보자, 빨대 꽂는 부분이 없는 뒷부분이 엉망으로 빨대에 찧어져 구겨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야마구치를 바라보다 그제서야 그 뒤에 서 있는 츠키시마를 얼핏 확인했다. 그러자 갑자기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카게야마가 제대로 우유를 뒤집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 고마워.’ 이 말만을 하고 카게야마는 학교 건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것이 히나타가 본 첫 번째 이상함이었다.


두 번째로 히나타가 카게야마에게 이상함을 느꼈던 것은 부 활동 시작 전의 일이었다. 히나타는 다른 부원들 몇명과 함께 라커룸에서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들보다 조금 늦게 혼자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맹한 얼굴로 나타난 카게야마는 자신의 가방에서 운동복을 꺼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안에 있던 누군가가 당황한 듯한 소리를 냈다. ‘어, 어어…….’ 그 소리에 히나타를 비롯한 네다섯 명의 시선이 카게야마에게 쏠렸다. ‘저, 카게야마 선배…!’ 1학년의 타지마가 카게야마를 말렸다. 왜냐는 듯이 타지마를 쳐다본 카게야마는 아직도 자신이 교복 위에 운동복을 입으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때쯤에 문이 열리고, 츠키시마가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아….’ 잠시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돌린 카게야마가 그제서야 팔에 끼웠던 티셔츠를 캐비닛에 던져넣으며, 하복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히나타가 본 두 번째 이상함이었다.


세 번째는 방금 있었던 일이다. 서브 연습을 하고 있던 히나타가 자신도 강력한 서브가 하고 싶다는 이유로 점프 서브를 시도해보고 있을 때였다. 특유의 점프력으로 높게 뛰었다가 있는 힘껏 공에 손바닥을 맞추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생각보다 공이 낮게 맞았다. 어어……. 공이 이상한 궤도로 날아간다 싶더니 그 앞에는 공교롭게도 토스를 맞춰보고 있는 카게야마가 있었다. 뻐엉. 꽤 큰 소리를 내며 배구공이 카게야마의 뒷목 부근에 명중했다. 카게야마의 고개가 퍽, 앞으로 떨궈졌다. 체육관에 있던 모든 부원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히나타는 착지한 모습 그대로 굳은 채 당황한 듯 입만 크게 뻐끔거렸다. 작년에 카게야마의 뒤통수를 맞췄을 때가 오버랩 되면서 히나타는 덜덜 떨며 천천히 카게야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멈춰있던 카게야마의 고개가 서서히 들리며, 곧 히나타에게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히나타가 몸을 바짝 굳히며 ‘미, 미안, 진짜 미안, 카게야마….’ 라고 말하며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히나타의 예상과는 다르게 카게야마의 표정은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었다. 오히려 카게야마는 개운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말했다. ‘더 열심히 해라.’ ‘…상사입니까.’ 그렇게 뒤를 돌아 체육관 벽을 향해 걸어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은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비틀비틀거렸다. 카, 카게야마가 자신에게 화를 안내고, 오히려 독려(같지는 않았지만)를 하다니. 히나타는 결국 몇 번 뒷걸음질 치다가, 엔노시타에게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히나타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엔노시타는 결국 카게야마가 이상하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저 짐작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

“역시 카게야마가 아까부터 이상하네.”


코트 밖에서 물을 마시던 야마구치가 츠키시마를 향해 말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찝찝하다는 듯 앞머리를 만지던 츠키시마는 ‘카게야마’ 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귀엽구나, 츳키…! 야마구치는 츠키시마가 알았다면 질색했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두 사람이 숨기려고 노력해도 츠키시마와 카게야마가 어느 순간부터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것은 쭉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인 야마구치에는 알기 쉬운 변화였다.


“…바보가 오늘따라 더 바보짓 하는 건데 뭐.”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츠키시마는 비틀비틀거리며 반대편 체육관 벽으로 걸어가는 카게야마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결국 조금 뒤에 츠키시마는 미묘하게 표정을 웅그라트리며, 쳇,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는 츠키시마가 조그맣게 고개를 숙이며 야마구치를 향해 중얼거렸다.


“……야마구치. 너 먼저 연습하고 있어.”

“응. 츳키!”


야마구치는 다시 한번 츠키시마가 알면 질색할 말을 몇번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

벽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린 카게야마의 시야로 아이스팩 하나가 들어찼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끝까지 빳빳이 들어 올리고 나서야 아이스팩을 건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2학년이 되어서 190cm대에 들어서더니 최근 몇개월 사이에도 조금 더 큰 것 같다. 카게야마는 왠지 배구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츠키시마에게 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츠키시마가 받으라는 듯이 아이스팩을 쥔 손목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와 마주친 시선을 흘끔 돌렸다.


“필요 없어.”

“그냥 받지?”

“됐다니까.”


눈을 가늘게 뜬 츠키시마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이 고집밖에 안 남은 녀석이 말을 들을까 잠시 생각했다.


“너 지금보다 더 심하게 부어올라서 연습에 지장가고 싶은거야?”

“…….”

“그거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완전 민폐야. 쓸데없이 이런 걸로 오기 부리지 말지?”


카게야마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렇지만 츠키시마의 예상대로 카게야마는 확실히 츠키시마의 손에 있던 아이스팩을 뺏듯이 낚아챘다. 츠키시마는 그제서야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왔다. 약간 빗맞기는 했다고 해도, 히나타가 거의 최대의 힘으로 내려친 서브였다. 그것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완전히 멀쩡할 리가 없다. 단지 카게야마는 자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츠키시마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어질어질 거리는 뒤통수와 화끈거리는 뒷목에 쭈뼛쭈뼛 아이스팩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 뒷목이 부어오를 것 같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을까.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스팩이 맞닿은 뜨듯한 뒷목이 순식간에 얼얼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는다. 숙인 뒤통수 위로 따끔따끔하게 시선이 느껴졌다. 괜히 가슴이 쿡쿡 찔렸다. 이내 츠키시마가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카게야마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

“………왜.”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해.”

“…….”


카게야마가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카게야마는 무의식중에 ‘싫다’고 생각했다. ……무슨 얘기? 카게야마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물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던진 질문에 츠키시마의 답변을 떠올렸다. ‘그 때 일은 미안. 그런데 난 아직 너랑 키스 같은 거 할 생각이 없어.’ ‘우리 둘 다 남자잖아. 스킨십은 아직 거북하다고.’ 이 정도는 이미 카게야마의 예상 범주에 있었다. 이런 것들도 아니라면,


‘헤어지자.’


카게야마가 숙였던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코트 위로 이미 걸어가고 없었다.






***


“어딜 가는 거야.”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와 뒤에서 손목을 빠르게 잡아채는 손길에 카게야마가 도둑질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몰래 도망치려고 했던 카게야마의 술수가 츠키시마에게 빤하게 들통난 것이다. 오늘따라 조금 이르게 쭈뼛쭈뼛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카게야마를 보고 츠키시마가 따라서 체육관을 나온 것이었다. 뻣뻣하게 츠키시마가 있는 쪽으로 뒤돌아보는 카게야마의 표정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10시에 가까워진 시각. 새까만 하늘 아래, 꽤 떨어져 있는 체육관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조그만한 전광과 눈앞에 있는 츠키시마의 머리칼만이 밝았다.


“왜 도망가는 건데?”

“도망이라니, 누가….”


도망이라는 말에 괜히 발끈한 카게야마가 주먹을 꾹 내 쥐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은 손에도 꾸욱 힘이 더해졌다.


“그렇다면 이게 도망이 아니고 뭔데? 얘기하자고 했잖아.”

“……난 별로 하고 싶은 얘기 없어.”

“그래도 얘기해.”


‘헤어지자.’ ‘헤어지자.’ ‘헤어지자.’ …….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수없이 많은 네 글자가 츠키시마의 목소리에 쌓여 와글와글 뭉쳐 들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이 뱅뱅 꼬여 들었다. 그런 카게야마와 마찬가지로 츠키시마도 무언가를 고민하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잠시 뜸을 들이며 입술을 벌렸다. 그러니까………. 말꼬리를 늘이며 머뭇거리던 츠키시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정말 나랑 키스 같은 게 하고 싶은 거야?”

“…….”

“하지만, 원래 이런 거에 별로 흥미 없잖아? 누구한테 무슨 부추기는 말이라도 들었어?”


츠키시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몸 안에서 무언가 쿠웅,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 츠키시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누가 부추겨서 그런 게 하고 싶은 게 아니야. 아까전에 공에 맞은 뒷목이 괜히 따끔따끔거렸다. 입술을 앙다문 카게야마가 츠키시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츠키시마도 대답이 없는 카게야마를 의아한 눈으로 마주했다. 입술선이 자꾸 비틀리는 것을 꾹 참아낸 카게야마는 이내 마음을 굳게 정한듯 츠키시마의 뒷목을 우악스럽게 한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어 올리며, 동시에 츠키시마의 뒤통수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츠키시마의 동공에 시퍼런 눈동자가 가득 들어찼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두 얼굴이 마주쳤다.


“……!”


1초, 2초, 3초, 1초씩 지나갈수록 츠키시마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가득 넘실거렸다. 잠시 멈춰있던 카게야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느릿하게 숨을 고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남자니까 안되는 거냐?”

“…잠,”

“맞아. 니 말대로, 사실은 나도 이런 거 필요 없다고 생각해. 솔직히 별 관심도 없어.”


담담하게 말을 잇던 카게야마의 표정이 지금껏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것과는 달리 서서히 일그러졌다.


“…카게야마?”

“하지만, 하지만……,”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 츠키시마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이제 카게야마는 명백하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가 얼굴을 피하니까, 제대로 이유를 안 말해주니까…! 나는 멋대로 상상하는 수밖에 없잖아!”


카게야마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가 싫어, 싫어하는 것 같아서, 니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어. 하지만, 나는, 모조리 처음 겪어보는 것들뿐이라, 누군가와 사귀는 것도, 입술이 닿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처음이라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내가 남자라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나라서 싫은건지, 너 같이 배배 꼬인 녀석의 생각 따위 내가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한사코 말을 내뱉던 카게야마가 길었던 소리침을 끝내고 허어, 허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카게야마의 시야에 커진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츠키시마가 들어찼다. 열대야의 뜨듯한 적막이 눅눅하게 둘의 몸뚱아리를 감쌌다. 열기를 품은 적막이 어색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게야마가 흐트러진 가방끈을 바르게 쥐었다. 카게야마가 뒤로 한발짝 걸으며, 곧 몸 방향을 비틀었다. “나 먼저 집 간다.” 작게 중얼거린 카게야마가 한발자국 걸었을 때였다. 츠키시마가 다시 한 번 카게야마의 팔뚝을 강하게 붙잡으며 큰 소리를 냈다.


“그런 게 아니잖아, 사람 말 좀 들어…!”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 돌린 츠키시마가 답지 않게 큰 목소리를 했다. 카게야마가 처음 보는 츠키시마의 모습에 입술만 작게 끔벅거렸다. 츠키시마는 어쩐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우물쭈물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너한테 사고가 생길까봐 그런거 뿐이야.”

“……사고? 무슨 말이야 그게.”


츠키시마가 답지 않게 조금 민망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냥 어렸을 때 트라우마 같은 건데.”

“트라우마?”


카게야마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쪽팔리니까, 이래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츠키시마가 혼자 생각했다.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의 반응을 보기 위해 카게야마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놀라거나 놀리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카게야마의 얼굴이 예상과는 다르게, 웬일인지 삐죽 빼죽 미간을 찌푸린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카게야마가 곧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당당한 얼굴로 물었다.


”트라우마, ……가 뭔데.”

“아, 바보였지?”


결국 츠키시마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어이, 비웃지 마! 카게야마가 괜히 소리쳤다. 한동안 비웃듯이 낄낄대던 츠키시마가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츠키시마는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고 멋적은 듯이, 부러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냥, 이런 것들이야.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한테 처음으로 귀엽다고 뽀뽀했더니 웬일인지 바로 교통사고로 죽어버렸어. 산책 중이었는데 잠깐 목줄을 놓친 사이에 바로 도로로 뛰어들었거든. 이 일부터가 시작이었어.”


이렇게 말한 츠키시마는 이내 차분하게 표정을 가라앉히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거 뿐이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몇 년 뒤에 또 그런 일이 생겼어. 사실 어렸을 때에도 나는 사람들에게 그리 살가운 편이 아니었는데, 그런 나한테도 유독 신경 써주던 삼촌이 계셨어. 나도 앞에서는 별로인 척 했지만 사실은 그 삼촌이 멋있어보여서 잘 따랐어. 그런데 어느날 삼촌이 우리 집에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나한테 평범하게 장난을 쳤어. 들어 안아서 억지로 뽀뽀하는, 그런 인사 대신 같은 거.”


그러나 그때, 11살의 츠키시마는 무의식중에 몇 년 전에 키우던 자신의 강아지를 떠올렸다. 츠키시마는 왠지 자신에게 또 보자고 손인사 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며, 뒷목이 서늘했다. 그리고 츠키시마의 불안함은 적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츠키시마의 삼촌이 운전하던 차는 화물 차량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대략 이러한 내용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돼서, 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출근하시기 전에 나에게 다녀오세요 키스 같은 걸 해달라고 하셨어. 아마 아버지는 삼촌이 돌아가신 이후로 자기 탓이라고 믿고 있는 나를 편하게 해주려는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아버지는 그날 공사 중이던 역전을 지나가다가 떨어지는 건축 자재에 깔렸어. 의식 불명이라고 해서, 나는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 아마 내색은 안 했지만 어머니도, 형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다행히 이주일 뒤에 깨어나셨지만…. 츠키시마가 마지막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말꼬리를 늘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사방이 조용해졌다. 카게야마도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츠키시마를 가만히 주시했다.


“웃기다는 건 알고 있어. 나도 머리가 커졌고, 그런 건 나랑 아무 상관 없었다는 걸 알아. 그런 건 내 탓이 아니었다고 당연히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아직도 어렸을 때 느꼈던 것들이 남아 있어. 쪽팔리지만 솔직히 말하면 며칠 전에도 그랬고 방금도, 너가 다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라. 그래서 멈췄어, 후회할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

“그러니까……,”


츠키시마가 마지막으로 말을 이으려 할 그때였다. 카게야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게 무슨 저주라도 된다는 거야?”


카게야마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츠키시마를 똑바르게 쳐다보았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새까맣게 번득였다. 카게야마가 정말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츠키시마는 결국 말하려던 것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할 말을 생각하듯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던 카게야마가 곧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이내 두 주먹을 꽉 내 쥐었다.


“트라우마인지, 저주인지, 주문인지 뭔지! 그딴 거 내가 알게 뭐냐……! 내가 관심 있는 건 너가, 너도, 나랑 이런 걸 하고 싶냐 하고싶지 않냐 이거야…!”

“……….”

“하고 싶지 않다면……… 읏, 그럼, 그런 변명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싫다고 해.”


‘하고 싶지 않다면’ 이라고 말한 뒤 스스로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을 짓씹는 카게야마를 보고, 츠키시마는 자신이 카게야마를 향해 질색할 만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속으로 자조했다. 카게야마는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카게야마는 뒷목을 갉작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도, 아주 만약에, 정말 진짜 만약에,”

“…….”

“배구랑 전혀 관련 없고 별 필요 없는 것인데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말꼬리를 늘이며 쉬이 뒷말을 잇지 못하는 카게야마를 보며, 츠키시마는 ‘하자’는 식의 말은 죽어도 못 뱉겠나 보다, 하고 확신했다. 결국 츠키시마는 그런 카게야마가 빤히 보이는 것에 다시 소리내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츠키시마가 웃는 것을 본 카게야마가 그제서야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너 진짜 짜증 나. 카게야마가 한껏 튀어나온 입술을 빼족였다. 츠키시마는 왠지 깊이 내려앉아 있던 먼지가, 카게야마의 대단한 멍청함에 쓸어내려 간 기분이었다. 츠키시마는 이제서야 씨익, 평소대로 웃었다.


“만약 실제로 내 말대로 되면, 천하의 왕님이 배구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정말 괜찮은거야?”

“그러니까 계속 말했잖아. 내가 네까짓 비실대는 놈의 저주에 걸리기라도 할거같애? 난 절대 안 죽고, 절대 안 다쳐.”


카게야마는 어깨를 까딱, 들썩이더니, 이내 어느 때보다 당당한 낯빛을 했다. 그리고는 곧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츠키시마의 몸이 카게야마에게로 이끌렸고, 여전히 땀에 젖은 금빛 머리칼이 사르륵 앞으로 기울었다. 반짝이는 새카만 눈동자에 츠키시마 얼굴이 들어찼다. 카게야마가 여전히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저주든 뭐든, 다 풀리게 해줄 테니까, 덤벼봐, 멍청아.”


결국 츠키시마는 항복을 인정했다. 멍청아, 라니. 정말로 바보가 누군데. 속으로 궁시렁 댄 츠키시마는 부러 심장이 쿵, 쿵, 거리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천천히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뒷목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역시 손바닥에 닿는 뒷목이 약간 뜨듯하게 부어있는게, 뭐라도 발라야겠다 싶었다. 집에 가도 자고나면 낫는다고 그냥 잘 녀석이지, 이 녀석은. 츠키시마는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무더운 여름밤, 땀에 절은 머리칼이 눅눅한 바람에 엉망으로 흔들렸다. 여느 드라마에서와 달리 가로등 하나 없이 서로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그저 어두컴컴한 길바닥이었다. 분명, 지금은 그 날보다 두 사람이 첫 키스를 나누기에 완벽한 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맞대어진 카게야마의 까만 앞머리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땀에 젖어 축축했다. 츠키시마는 이제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넜구나 생각했다. 곧 카게야마의 퍼렇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와 츠키시마의 금빛으로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아주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마저도 뜨거운 열기가 들뜬다.


문득 츠키시마의 뇌리에 파노라마처럼 몇 개의 장면들이 마구 스쳐 지나갔다. ‘삼촌이 또 보러올게. 케이, 그때까지 더 커져있으렴. 기대할게.’ ‘삼촌이 집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대.’ ‘케이. 아빠한테 다녀오세요 뽀뽀는 안 해줄 거니?’ ‘내 입은 저주 받았는데 괜찮아?’ ‘앗키, 엄마 병원 다녀올게.’ ‘오늘은 형이랑 둘이서 자자.’ 위잉. 위잉. 시끄러운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츠키시마의 귓전을 강타했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이번에야말로 망설임 없이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츠키시마의 귓가를 어지럽히던 소음들이 일순에 고요해졌다. 뜨듯미지근한 열대야의 바람이 불었다.


땀 냄새 풍기는,

완벽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