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웰

여름 밤 탓


여름 밤 탓

, AuroraHalf The World Away를 듣고 왔습니다. 오늘따라 얘기가 길어질 것 같네요. 애인 있으신 분들은 잘 들어두세요. 벚꽃의 계절, 4월이 되어 날씨가 많이 풀렸죠? 소풍 가기에 완벽한 날씨네요.

완벽한 날씨는 무슨, 아직도 바깥은 쌀쌀했다. 벚꽃 잎에 취해 봄 차림으로 나갔다가는 감기에 걸려버리기 십상이었다. 아직도 동복에 겉옷까지 걸쳐 입은 학생들이 흔했다. 교정의 흩날리는 벚꽃이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고는 해도, 그 설레는 영화의 주인공은커녕 조연도 못 할 자신을 알고 있기에 봄이 그리 낭만적이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봄 내음에 취해 첫 눈에 반했다 말하고, 하루만 지나도 상해버릴 사랑고백을 해대고. 그런 짓은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질색이어서, 벽에 걸린 뜯어내는 달력이 끝을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만남이 신선한 것도 딱 이 주, 가지 한 개 꺾어 훔쳐가고 싶던 벚꽃이 거치적거리게 밟히는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도 딱 이 주다. 유통기한 이 주짜리에 목매는 것만큼 멍청한 게 있을까, 하고 또 허망이 이 주를 보내고. 그렇게 동나길 기다렸던 4월의 달력이 모두 찢기고, 제멋대로 구부려진 못에 또 5월의 달력이 걸렸다. 아슬아슬하게 못의 끝을 꽉 붙잡은 종잇장들은 5월에는 사랑이던 무엇이던 네 잔잔한 일상을 부수어 버릴 거야, 하고 또 외친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렇게 외쳤던 것들이었으니 꽃피는 춘삼월만큼이나 달콤히 느껴지는 5월의 별명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사랑의 달 오월이 말이 될까. 4층 계단참에서 고백하면 상대가 꼭 받아준다느니, 이름이 적힌 부적과 잘 말린 꽃잎을 베개 밑에 넣어두고 자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느니 하는 소문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좋게는 현실적, 나쁘게는 냉소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거부할수록 다가가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라서 그러는 걸까, 오월은 나에게 더 질척이게 달라붙는다. 사랑 운이라든가 그런 건 전부 불쌍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 동급생들에게 가버렸으면 좋을 텐데. 17년 치 사랑 운을 보상받는 것처럼 네가 툭 등장해버렸을 때, 그 때. 어울리지 않게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괜히 햇살이 눈을 찌르는 오월을 탓했다.

* * *

오월이 나에게만 귀찮게 군다는 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얇아진 달력이 오월도 끝자락임을 알려주었지만, 마냥 안도의 한숨만 내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카게야마가 주연인 로맨스 영화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다. 상대역이 나만 아니라면 저기 지구 한 바퀴 너머의 여자애와 편지로 사랑을 주고받던, 정체도 모르는 인터넷의 사람과 쪽지를 나누던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종종 기억을 더듬듯 카게야마를 떠올렸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걸 털어놓기는 싫지만, 순서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를 떠올리니 얼굴이 달아올랐고, 자연스레 기억이 재생됐을지도. 그러나 여기에는 명백한 모순점이 하나 있었다. 겨우 그를 떠올렸다고 뺨을 붉힐 리 없었다. 주연 감은 아닌 무미건조한 나와, 역시나 주연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너로 로맨스 영화를 찍을 수는 없다. 아무튼 볼을 붉게 물들인 채로 더듬은 기억의 처음에는, 카게야마가 있었다. 물소리에 제 목소리가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분수대에 바짝 다가가서는, 이름 모를 선율을 흥얼거렸다. 감미로운 음정은 그대로 귀에 꽂히지만 입술을 움직이며 내뱉는 가사들은 들려오지 않았다. 물소리에 목소리를 묻으려는 계획이었다면 그 전략은 반쯤은 성공한 것이었다. 그건 백 점 만점에 오십 점 정도 줄 수 있다. 그러나 웬만해선 마음이 동하지 않는 나를 끌어 들었으니, 특별히 칠십 점 정도 주고 싶다. 또 시간 낭비인 걸 알면서도 매일 밤 그를 찾아가게 되었으니, 십 점 올려주어 팔십 점 정도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 마음에 점수를 매길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백 점짜리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면 감정을 인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늘은 구십 점이 될까 하고 다시 카게야마가 있을 분수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방해 된다고 했잖아.

어쩌다가 말하게 되었더라. 통성명은 했었나? 이름을 알고 있으니 아마 했겠지. 분명히 대화의 시작은 예민한 카게야마가 제 연습에 방해된다며 가달라고 말하는 것부터였을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재수 없어 보이게 대답했던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강 여기 네가 전세 냈냐는 식으로 말했을 텐데 구십 점짜리 사랑을 만들러 와서는 한심하게 그 때와 같은 답을 내뱉어버렸다.

네 노래를 들으러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대단한 자신감이네.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표정을 구겼지만 별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굴었는데 그 수법은 너무 얄팍했다. 감정을 숨기려면 자신처럼 꼼꼼하거나 원체가 정이라곤 없어야 한다. 그는 빈말로라도 꼼꼼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툴툴거리면서도 꾸준히 제게 말을 거는 걸로 보아 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차갑게 대꾸해도 지금처럼 또 말을 걸었다.

됐고, 신청 곡 있냐?

저번처럼, 하고 덧붙이는 게 아무래도 엊그제 연애담을 불러달라고 한 게 생각났나 보다. , 속도 좋아. 그렇게 쌀쌀맞게 응수했는데도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하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 자란 사내, 그것도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동갑내기한테 귀엽다는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럴 때 보면 귀엽다는 말이 입에서 맴돌았다. 절대 내뱉을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생긴 건 고양이 같은 게 하는 짓은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환하게 웃어준 것 같은데, 카게야마가 움찔 몸을 떠는 걸로 보아 입 꼬리를 비틀어버렸나.

농담 반 진담 반 유명하니까 너도 아마 알걸.

너는 그런 노래만 좋아하더라.

카게야마는 한참 목을 가다듬더니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을 던졌다. 그는 말할 때면 꼭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꺼릴 게 없으니까 저렇게 당당한 걸까. 아직 인정하지 못한 감정들이 심장을 꾹꾹 눌러서, 괜히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런 노래?

그냥, 코끝까지 달달해지는 노래. 너랑 안 어울려.

단정 짓는 투로 말하는 게 대체 내가 어떻게 보였나 싶어 억울했지만, 저와 달달한 노래가 어울리지 않는 건 맞았다.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하면 기겁하겠지. 그 때도 어울리지 않다고 하려나. 상념에 빠져 어느새 카게야마가 노래를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익숙한 가사가 네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니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내 비웃는 듯한 웃음이 습관인 것처럼,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뚫어지게 쳐다 좀 보지 마,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알면서. 이번만큼 가사가 절절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을까. 괜히 지기 싫어서 경쟁하듯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한 소절 한 소절을 성실히 읊는 입술부터 시작해서 푸른 기가 도는 눈까지 살결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 그 각도 그 표정 네 얼굴, 난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이끌리듯 다가가, 숨결이 들릴 거리까지 몸을 붙이고는 얌전히 사랑스러운 단어들을 내뱉는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조차 모르겠다. 부드러운 촉감이 잠깐 전해진 것뿐인데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내게 이런 일은 한 번 이면 난 됐어요. 멍하니 다시 부르지 못했던 마지막 소절을 중얼거리고는 카게야마는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바보같이 가방을 떨어뜨리고는. 학생 가방치고는 가벼운 검은색 가방 안에는 구형 핸드폰과 구겨진 프린트 몇 장뿐이었다.

* * *

마침내 봄이 끝나고 찌는 듯한 더위와 함께 7월이 시작됐다. 못 할 짓을 하는 기분으로 연락처를 열어봤지만 저장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칼 같이 아홉 시에는 분수대에 모습을 보이던 너는 자취를 감췄다. 학교도 사는 곳도 몰랐으니 너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애초에 찾아갈 용기도 없었지만. 조용히 품은 기대와 달리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핸드폰과 가방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보다 제 얼굴을 보는 게 더 싫은 걸까. 분수대를 일부러 피해가느라 등교시간이 늦어졌다. 처음으로 지각을 해봤고, 괜히 네 생각이 떠올랐지만 원망은 하지 않았다.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감촉은 그대로 입술에 감돌았다. 농담처럼 입술을 부딪쳤지만 네가 나를 피한다는 현실을 생경하게 다가왔다. 요즈음엔 쉽게 지쳤다. 열병도 아닌 게 자꾸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시야가 어지러웠고 각막에 네 얼굴이 씌워진 것처럼 아른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감기를 핑계로 시원하게 학교를 빠지고는 습관처럼 네가 두고 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가 귀를 울리는 기계음에 화악 눈꺼풀을 들었다.

카게야마, 9시야!! 학교에서 말했지만 너 까먹을까봐.

히나타 소요, 라면 연락처에 저장된 몇 안 되는 이름 중에 하나였다.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세게 핸드폰을 닫았다. 아홉 시. 아홉 시라면 혹시. 분수대는 꽤 큰데다가 밤에는 색색의 빛을 아래에서 쏘아 올려 근처의 학생들이 자주 모였다. 간간히 제 학교나 카게야마와 같은 교복을 입은 연인들이 손을 꼭 잡고 근방을 거닐었다. 알람을 아홉 시로 맞춰놓고는 눈을 감았다. 당연히 꿈엔 네가 나오지 않았다.

* * *

귀에 익은 알람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시침은 막 9를 가리키고 분침은 12의 경계에서 흔들리듯 넘어갔다. 약속이 9시라면 9시까지 가야 하는 건데, 멍청하게도 9시에 눈을 떠버렸다. 뛰어 가도 오 분이었다. 가는 시간도 계산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자신을 탓하며 급하게 겉옷을 챙겨 입었다. 스트라이프 무늬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고민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아홉 시마다 걸었던 길을 숨이 찰 정도로 뛰었다. 발걸음이 둥근 궤적을 그리며 네가 있을 곳을 쫓았다. 어느새 네가 있을 거라는 현실성 없는 믿음이 생겨버렸다. 백 점은 채운 지 오래였다. 입술이 닿을 때까지 인정하지 못했던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대화를 끝내고 돌아서는 네가 보였다. 깨끗한 흰 운동화부터 네 모습을 하나씩 훑었다. 애달프게 너를 그렸던 만큼 감회가 새로웠다. 마지막으로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에 시선이 닿았다. 이러다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려버릴지도 모른다. 주연 츠키시마 케이, 하고 말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하나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사랑은 모두 끝나버리고 너와 나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가 돼서야 사실은 사랑했노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감정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네 웃음으로 백 점을 채웠다고 치자. 그리고 서늘한 밤공기 때문에 괜히 설렜다고 하자. 완벽한 여름날을 혼자 보내기는 아까우니 함께 할 사람을 구한 것일 뿐이다. 변명들을 덧붙이며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변명처럼 내뱉은 좋아한다는 말에 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걸 보며, 다시 여름 밤을 탓했다